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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복합문화공간'이라는 장소가 전국에 우후죽순 생기고 있다. 전시회 관람, 영화 감상, 공연 등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을 음료와 함께 즐기자'는 취지의 공간이다. 창원시 사림동에 위치한 '스페이스 펀'도 이와 같은 장소다. 하지만 다른 곳과 차별화되는 것이 있다. 바로 '사람'이다. 건물 유리창에 적혀있는 '스페이스 펀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 연결되는 재미를 경험하는 공간입니다'라는 문구가 이를 잘 나타낸다. 서로의 가치를 존중하고 개인의 관계망이 넓어지길 바란다는 스페이스 펀은 많은 사람들에게 '재미'를 선물하고 있다. 그 공간을 직접 기획하고 만든 안성현(36) 대표를 만나봤다.사람·운동·문화안 대표는 어린 시절부터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여러 가게를 운영하던 어머니를 보며 자연스럽게 장사에 눈을 뜨게 됐고 직업으로 이어졌다."부모님의 철학, 생활 습관들이 제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어머니는 제 성격상 회사에 취직하는 것보다 장사를 하는 게 더 나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셨어요.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장사를 하겠다고 했을 때 적극적으로 응원해 주셨죠."안성현 복합문화공간 '스페이스 펀' 대표.얼핏 부유한 가정에서 고생 없이 자란 듯 보였지만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 학창시절 때부터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을 했다. 그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신문 배달, A/S 방문기사, 의류판매 등 돌이켜 보니까 참 많이도 했네요. 이 모든 일을 자발적으로 시작했어요. 미래에 하고 싶은 사업을 하기 위해선 지금부터 몸으로 부딪치면서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어렸을 때부터 했습니다. 덕분에 아무리 힘든 순간도 지나고 보면 다음으로 갈 수 있는 힘이자 밑바탕이 된다는 것을 또래들보다 먼저 깨달을 수 있었죠."안 대표는 스페이스 펀 이외에도 헬스장과 사우나를 따로 운영하고 있다. 운동과 문화, 이 두 가지가 처음에는 선뜻 매치가 되지 않았다."운동을 가장 좋아해 헬스장을 시작했지만 그 못지않게 사람과 문화를 좋아했습니다. 관심사가 다양한 사람도 있지 않겠습니까? 어느 날 '세 가지를 결합한 사업을 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분명 새로운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때마침 대학 후배가 창원에서 문화사업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죠. 이때다 싶어 바로 연락을 해 스페이스 펀을 만들게 됐습니다."사람이 매개체가 되는 공간스페이스 펀은 사실 안 대표의 가족이 거주하던 주택이었다. 지하부터 1층, 2층 그리고 옥상까지, 주택 전체를 개조해 지금의 스페이스 펀을 만들었다.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을까?"지금 인터뷰하는 장소가 원래는 지하주차장이었고 1층은 주방과 안방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부모님이 걱정을 많이 하셨지만 정확한 사업 구상과 계획을 말씀드렸고 결국 허락해 주셨어요. 그리고 집을 무료로 받은 게 아닙니다. 현재 주위 시세보다 더 많은 월세를 꼬박꼬박 부모님께 지급하고 있습니다."스페이스 펀은 건물 외관부터 다른 곳과는 차별화가 느껴졌다. 오직 파란색과 하얀색으로만 도색해 색다른 느낌을 연출했고 은은한 조명이 건물 전체를 비추고 있었다. 그 덕분에 사람들 사이에선 일명 '파란 집'으로 불린다."스페이스 펀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색상을 정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대표할 수 있는 특징이 있어야 사람들의 기억에 더 오래 남죠. 많은 고민을 거듭하다가 파란색과 하얀색을 생각하게 됐어요. 깨끗하고 신뢰감을 줄 수 있는 색상이잖아요. 사람들도 이런 부분을 특이해하고 좋아해 주는 것 같아 기쁩니다."복합문화공간 '스페이스 펀'.내부는 '목욕탕'을 연상시키는 소품들로 꾸며져 있다. 목욕탕 타일이 벽면에 붙어있고 샤워기, 아령들이 공간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앞서 말씀드렸듯이 '사람·운동·문화를 결합해 보자'는 생각이 결국 지금의 스페이스 펀을 만들었죠. 처음에는 진짜 목욕탕처럼 만들려고 했어요. 탕 안에서 사람들이 음료를 마시는 모습을 상상했죠. 하지만 너무 실험적으로 가기에는 위험부담이 있어서 느낌만 연출할 수 있게 구성했습니다. 이렇게 특색 있고 재미있는 공간에서 문화를 즐긴다면 더 재미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요?"스페이스 펀은 앞서 말했듯 '사람'이 매개체가 되는 공간을 지향한다. 보통의 복합문화공간처럼 단순히 작품을 전시하고 구경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공간을 찾는 모든 인원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소셜다이닝'(SNS를 통해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 정보를 공유하고 인간관계를 맺는 행위)이나 '강좌' 같은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대부분의 사람들이 회사 동료나 친구 말고는 누군가를 만나기가 어렵잖아요. 그래서 전 주변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서 소소한 행위를 하고 단체 활동으로까지 이어지는 장소를 만들고 싶었어요. 처음 보는 사람들이 모여서 공통의 관심사를 얘기하고 정보를 공유하면서 일상의 행복을 찾는 거죠."최근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진행했다. 그 결과 야심차게 준비한 와인콘서트나 김광석 추모콘서트는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을 모으고 싶은 욕심이 났죠. 고민을 거듭한 끝에 '콘서트'를 떠올리게 됐고 지역 인디밴드나 엔터테인먼트와 협력해서 다양한 공연을 유치했습니다. 공통된 관심사를 한 공간에서 나누다 보니 입소문도 빨리 퍼지고 홍보도 자연스럽게 되고 있습니다."안성현 복합문화공간 '스페이스 펀' 대표.서로가 상생하는 길이뿐만 아니라 안 대표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예술인들을 지원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복합문화공간임을 자청하고 만든 곳인데 지역의 문화나 예술적인 부분을 등한시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지역 작가들의 작품을 지하에 전시하고 독립출판물 소개나 사회적 기업 제품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지역 예술인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온라인 판매나 전시가 대부분이라 오프라인 판로는 부족한 상황이었죠. 그래서 제가 그 판로 역할을 자처했어요. 이런 노력이 서로가 상생하는 길이 아닐까요?"경영관 또한 특별했다. 대학교 인근에 있지만 대학생들을 타깃으로 정하지 않았다. 가격을 낮추기보다는 '시간과 공간을 판다'는 개념으로 스페이스 펀을 경영했다."저는 처음부터 대학교 학생들을 타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학교 앞에서 판매하는 가격으로 팔게 되면 이윤을 맞출 수가 없어요. 저희는 음료만 소비하는 카페가 아니라 복합문화공간이잖아요. 재미있는 활동과 프로그램을 음료와 같이 구매하는 거죠. 그래서 문화적인 활동이 가능하고 어느 정도의 소비가 가능한 '20대 중후반 여성'들을 목표로 잡았습니다. 감사하게도 그 생각이 적중했고 여성분들은 물론 남성분들까지 많이 방문하고 있습니다."안 씨는 인터뷰하는 동안 밝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에 행복하다고 말하지만 어찌 어려움이 없을까? 이 물음에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아무래도 수익과 비용의 균형을 맞추는 게 가장 어렵습니다. 양질의 프로그램과 서비스를 더 제공하고 싶지만 그만큼 많은 비용이 발생하죠. 예를 들어 저희가 유치하는 공연이 매진으로 이어져도 만족할만한 수익을 얻기는 참 힘듭니다. 그래도 제가 이 공간을 운영하는 동안은 그분들과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힘들더라도 예술인들과 같이하는 프로그램은 정기적으로 구상하고 있습니다."힘든 순간이 가끔 찾아오지만 행복해하는 고객을 보면서 다시 일어날 힘을 얻는다고 한다."저희 공간을 찾아주시는 고객들은 문을 열고 들어올 때 표정이 달라요. 뭔지 모를 기대와 설렘이 공존하는 얼굴이죠. 제가 금전적으로 조금 힘들다고 고객을 외면한다면 서로 간의 신뢰는 한순간에 무너지게 되죠. 그 행복한 표정을 지켜나가는 게 현재로써 저한테 주어진 가장 중요한 목표입니다."아기자기한 테이블.가장 중요한 건 자신만의 정체성현재 많은 창업 준비생들이 '복합문화공간'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먼저 창업을 경험한 선배로서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는지 물었다."'이 길이 정말 내가 원하는 길인가'하는 질문을 자신에게 끊임없이 던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확신이 선다면 그때는 시작해야죠. 단순한 복합문화공간은 더 이상 힘들다고 생각해요. 다양한 아이디어를 접목해보고 많은 단체들과 협력을 통해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아 나가야죠.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많은 시도와 도전을 했지만 아직 스페이스 펀에 접목해보고 싶은 것들이 무궁무진하다고 한다. 당장 내년부터 실행에 옮기기 위해 눈코 뜰 새 없는 날을 보내고 있다."어느 정도 틀이 잡히면서 이젠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는 여건이 됐습니다. 구상하고 있는 것 중 몇 가지만 말씀드리면 '옥상콘서트'를 운영할 생각입니다. 소음이라는 문제가 있지만 이웃 주민들과 잘 협의해서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 내야죠. 2층을 게스트 하우스나 소규모 공방으로 바꾸는 준비도 끝나가고 있습니다. 또 제가 하고 있는 헬스장과 접목시켜 다이어트 강의도 하면 좋지 않을까요?"유쾌한 인터뷰였다. 자신의 인생과 사업 구상을 말하는 모습에서 자부심과 당당함이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물어보니 뜻밖에도 아내에게 마음을 표현하며 인터뷰를 마쳤다."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결혼을 했습니다. 잠깐 회사에 취직하기도 했지만 뭔가 공허한 느낌이 들었죠.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고 꿈을 이루기 위해 와이프와 옷 가게를 시작했습니다. 제가 가는 길을 불만 없이 너무 잘 따라줬습니다. 고마운 사람이죠. 아내 덕분에 점점 사업을 넓혀 여기까지 오게 됐네요. 이젠 그동안 했던 고생을 다 보상해주고 싶습니다. 오늘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해야겠네요."
16.10.14."비타민C를 많이 먹으세요. 과다복용 부작용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다량 섭취해도 큰 부작용이 없습니다.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육체적으로 건강한 사람의 필요량을 측정하면 하루 50~100㎎으로도 충분할 수 있지만, 그렇게 건강한 사람이라고 자타가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되겠어요?"윤희상(61) 마산의료원장은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다. 당연히 윤 원장과의 인터뷰 내용은 여름방학 아이들의 건강관리 요령이 아닐까 짐작했다. 하지만 사전 인터뷰에서 윤 원장은 '헬리코박터 파일로리와 비타민C'에 대해 설명하고, 비타민C를 많이 먹으라고 강조했다.'헬리코박터 파일로리(Helicobacter pylori)'는 우리가 흔히 '헬리코박터균'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유산균 음료 광고를 통해 알게 된 사람이 많다.왜 소아청소년과 전문의가 위장 질환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진 헬리코박터균과 비타민C를 열심히 이야기할까?윤 원장을 만나 봤다.순천의료원에서 경상대 의대로인천이 고향인 윤 원장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과 대학원에서 소아과학을 전공했다.어린 시절 장래희망이 의사는 아니었다. 다만 3남 1녀 중 장남이었던 그에게 거는 가족들의 기대는 컸다.윤 원장은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진 않았다"며 멋쩍어하며 말했지만, 서울대 의대를 갈 정도로 공부를 잘했던 장남에게 가족들이 기대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딱히 다른 장래희망이 있던 것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의대를 갔는데, 환자를 보면서, 실습을 하면서 의사의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느끼게 됐습니다. 그리고 연구를 할 수 있는 기회 때문에 대학병원을 선택했죠."윤희상 마산의료원장.순천의료원에서 공중보건 전문의로 근무하다 경상대 의대 소식을 듣고 1988년 경상대학교 의과대학 소아청소년과학교실 전임강사로 옮겨왔다. 2001년 경상대학교 의과대학 부학장, 2005년 대한소아소화기영양학회 회장을 역임했다.쭉 경기도와 서울에서만 생활하던 윤 원장은 진주는커녕 경남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었다. 윤 원장과 서울에서 만나 연애 끝에 결혼한 부인 역시 진주는 처음이었다.이들은 낯선 도시에서 어떤 인상을 받았을까. 수도권에서만 살던 부부는 남해안 작은 도시에서 적응을 잘할 수 있었을까."아, 좋았어요. 서울에서는 이제 못 살 것 같아요. 복잡해서요. 이곳은 어디를 가도 거의 10분 이내에서 생활할 수 있습니다. 특히 진주는 더 그렇습니다. 하지만 서울은 조금 움직이려면 1시간은 기본이에요. 여기는 사람들의 정도 넘치죠. 마산의료원장 임기가 끝나면 다시 진주에 가서 살 겁니다."헬리코박터 파일로리와 비타민C윤 원장의 박사학위 논문은 '한국인 연령별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감염 양상에 관한 연구'라고 했다.1988년 경상대학교 의과대학 소아청소년과학교실 전임강사로 발령받은 윤 원장은 당시 미생물학교실 주임교수였던 이광호 교수를 만나게 됐다. 인사차 면담을 했는데, 이 교수는 비타민C 가루 1㎏을 주면서 한 찻숟가락씩 하루 3번 식후에 복용하라고 권했다.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운명적인 순간이었다.이후 이 교수와 비타민C를 복용해야 하는 이유 및 연구 주제에 관한 토론을 통해 의학 연구 평생의 멘토와 멘티 관계가 이루어졌다.이 교수는 1987년부터 위염 원인균인 헬리코박터 파일로리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면서 1988년 대한미생물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 헬레코박터 파일로리에 의한 위암 발생과정에 관한 가설을 발표했다.윤희상 마산의료원장."만성위염, 위궤양, 십이지장궤양, 위암 등 위장질환은 영유아 시기 위 점막에 감염된 헬리코박터 파일로리에 의해 시작됩니다. 이로 인한 지속적인 만성염증에 의한 활성산소 생성으로 위궤양, 십이지장궤양, 위암 등으로 진행합니다. 따라서 한국의 남녀노소 모두는 활성산소 제거제인 비타민C를 복용하면 만성위염에 의한 위궤양, 십이지장궤양, 위암을 방지할 수 있고 위장질환에 부차적으로 발생하는 비타민C 부족증인 준괴혈병 및 괴혈병 증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가설입니다."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한 연구가 미생물학 교실을 주축으로 소아청소년과학교실과 병리학교실이 참여해 진행됐다. 그 결실 중 하나가 바로 윤 원장의 박사학위 논문이었다.윤 원장은 이 연구를 계기로 소아청소년과 중에서도 '내시경, 소아 소화기·영양'을 세부전공으로 하게 됐다고 밝혔다.영아 때 주로 감염헬리코박터 파일로리와 비타민C 관계를 좀 더 알아보자."헬리코박터 파일로리가 위 점막에 감염돼 서식해 만성 활동성 위염이 발생하면 인체 식세포가 위 점막 고유판에 중무장한 채로 몇십 년간 머무르면서 활성산소를 생성합니다. 이런 활성산소는 일차적으로 체내 비타민C를 소모시키죠. 헬리코박터 파일로리에 감염된 사람이 충분한 비타민C를 섭취 못 하면 위액뿐 아니라 체내 비타민C 농도가 감소합니다. 활성산소는 세포막 지질, 각종 단백질 및 효소, DNA 등 세포 각 성분에 무차별로 직접적인 손상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타민C는 인체에 유용한 대표적인 항산화제입니다."헬리코박터 파일로리 감염에 대해 윤 원장은 "지금은 인식 개선 등으로 감염률이 아주 많이 줄었다"고 밝혔다."제가 처음 연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우리나라 20세 이상 인구 중 90%가량이 감염됐다고 했어요. 성인 대부분이 감염된 것과 마찬가지였죠. 지금은 20~30대의 30%쯤 될 거예요."윤 원장은 주로 어릴 때 밀접 접촉을 통해 헬리코박터 파일로리에 감염된다고 밝혔다. 성인도 감염 가능성이 있지만, 위산이 강하기 때문에 균이 체내에 들어와도 정착하기 어렵다는 것."만 2세는 돼야 어른 수준이 됩니다. 그전에는 위산 분비 능력이 약합니다. 영아에게 뽀뽀를 하거나, 대변에도 균이 있는데 손 씻기를 제대로 하지 않았을 때 등의 상황에서 감염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영아 감염률도 많이 줄었습니다. 예전에는 어른이 음식을 씹어서 아이 입에 넣어주면서 감염이 많이 됐죠."병원에서는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감염자 치료는 항생제로 하게 된다. 윤 원장은 항생제 치료와 더불어 비타민C를 꾸준히 섭취하며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윤희상 마산의료원장.요로결석 환자 비타민C 과다섭취 주의해야그런데 비타민C 과다복용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비타민C 하루 필요량은 정설로 괴혈병을 예방할 수 있는 용량인 하루 50~100㎎으로 충분하다는 견해와, 현재 비타민 권장량의 100~1000배인 10~100g으로 하자는 메가 용량 비타민 학설이 있습니다. 이 두 견해는 끊임없이 이어져 왔으며, 적어도 피상적으로는 정설이 옳은 것으로 인정되어 왔으나, 메가 용량 주장이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경상의대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연구팀은 지난 20년간 비타민C를 하루 10~100g 복용해 왔습니다. 그 결과 비타민C의 효용과 부작용에 관한 정보가 크게 잘못돼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윤 원장의 비타민C 예찬론은 계속 이어졌다.하지만 비타민C를 과다복용하면 요로결석 등의 위험이 있다는, 메가 용량 학설에 반발하는 쪽의 의견도 무시할 수 없다."물론 주의할 점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요로결석입니다. 요로결석이 잘 생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히 여름에 땀을 많이 흘리면 소변이 진해져 더 안 좋을 수 있습니다. 이때는 물을 많이 마시면 됩니다. 단, 소변이 천천히 내려가는 등 요로에 구조적 이상이 있는 경우에는 비타민C를 주의해서 먹어야 합니다. 위가 나쁠 때 비타민C를 과다복용하면 속 쓰림이 있을 수 있는데, 이런 사람은 식후에 복용하면 됩니다."윤 원장은 일반인도, 아이들도 비타민C를 많이 먹는 것이 좋다고 강조했다."활성산소 제거와 건강관리를 위해 평소 비타민C를 많이 먹는 것이 좋습니다. 비타민C를 먹으면 입맛이 돌기 때문에 아이들 성장에도 도움이 되겠네요. 비타민C를 많이 먹으세요. 굳이 고가의 비타민을 구입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렴한 가격의 제품도 괜찮아요. 그게 힘들면 비타민C 함유량이 많다고 알려진 녹차를 많이 마시세요."하루 비타민C 25알 복용비타민C 예찬론자라 할 수 있는 윤 원장 자신은 비타민C를 얼마나 먹고 있을까.깜짝 놀랄 대답이 돌아왔다."비타민C 1000㎎ 알약을 저녁에 25알 복용합니다."1000㎎ 25알이라면 25g이다. 비타민C는 시기 때문에 씹어 먹기 힘들고 물과 함께 삼켜야 한다. 25알을 모두 먹자면 그것만으로도 한 끼 식사는 거뜬할 정도로 배가 부르지 않을까."더 많이 먹다가 줄인 겁니다. 비타민C를 몇십 년 동안 먹어왔습니다. 이 정도 먹어도 아무 부작용 없습니다. 또 평소 녹차를 즐겨 마십니다."그 외 건강관리법을 소개해 달라고 하니 '걷기'를 추천했다.윤희상 마산의료원장."걷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45세 이후에는 평생 뱃살이 심하게 증가하지 않는 균형 있는 식사와 매일 걸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걷는 것을 대신할 불로장생약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습니다."윤 원장은 하루 얼마나 걷고 있을까?이 질문에 그는 약간 난색을 표했다. 슬그머니 웃는 모습이 '많이 걷지 않는다'는 대답이 나올 듯했다. 예상은 적중했다."진주에 살 때는 많이 걸었는데, 마산의료원으로 온 후에는 많이 못 걷습니다. 그야말로 '노력 중'입니다. 출퇴근은 걸어서 하는데, 집이 너무 가까워요.(윤 원장 자택에서 병원까지 거리는 500m 남짓으로 보였다.) 병원 내에서는 엘리베이터를 사용하지 않고 걸어 다니려고 합니다."비록 어릴 때 의사를 꿈꾸지는 않았지만, 다시 태어나면 무엇을 하고 싶으냐는 질문에 윤 원장은 "의사가 될 것"이라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꿈은 무엇일까."걸을 수 있을 때까지 의사이고 싶습니다. 사람은 혼자서 걷지 못할 때 죽더군요. 그러므로 악착같이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그동안 모아놓은 많은 자료들로 논문을 만들고 싶습니다."병원에 시니어센터 만들고 싶어마산의료원은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장군동4가에 위치하고 있다. 1914년 진주 자혜병원 마산 분원으로 발족해 1919년 도립 마산병원으로 바뀌었고, 1975년 도립 마산의료원으로 승격 개원했다. 1983년 지방공사 경상남도 마산의료원으로 발족했으며, 1996년 경상대학교 병원과 위·수탁 운영 협약을 체결했다.마산의료원은 현재 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청소년과·정형외과·신경과·신경외과·재활의학과·비뇨기과 등의 진료과가 있으며, 중환자 병상을 포함, 288병상을 운영 중이다.윤 원장은 2013년 12월 마산의료원장으로 취임했다.만년 적자에 허덕이던 마산의료원은 지난해 당기순이익 6억 3400만 원으로 10년 만에 흑자 전환하기도 했다."직원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2014년 2월부터 토요일 근무를 했어요. 처음에는 효과도 크게 없었고, 노동 강도가 높아져 일부 반발도 있었지만, 위기의식을 갖고 경영 개선을 위해 전 직원이 함께 노력하니 차츰 효과가 나타났습니다."윤 원장은 마산의료원의 가치는 공공성과 공익성이라고 했다."공공성과 공익성을 높이고 유지하기 위해 지역 민간병원에서 비용 등의 이유로 수행하기 어려운 의료 부분을 수행하겠습니다. 메르스 사태와 같은 감염병 위기가 발생했을 때 일차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국가 기준에 부합하는 독립음압병동을 건립하고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또 저소득층 지원 공공 의료를 취약계층 건강권 수호지원사업과 외국인 근로자 및 다문화가정 진료지원 사업으로 이원화해 집중할 계획입니다."마산의료원은 기존 건물을 허물고 바로 뒤쪽에 새 건물을 지었다. 9월 신축 기념식을 예정하고 있다. 기존 건물 자리에는 태양광 시설과 주차장을 만들었다.이 부분에서 윤 원장은 아쉬움이 크다고 했다.윤 원장과 인터뷰 한 시기에는 아직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았을 때로, 넓고 평평하게 다져진 땅을 보고 공원이 아닐까 짐작했다."아니에요. 공원이 아닙니다. 지상 주차장입니다. 사실 그게 아쉽습니다. 그곳에 어떤 시설을 만들고 싶냐고요? 주차장을 지하에 건설하고 시니어센터를 짓고 싶습니다. 이곳은 마산에서도 버스 여건이 참 좋은 곳이에요. 실버 플레이 그라운드라고 시니어센터를 만들어 어르신들이 와서 놀이 및 복지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16.10.05.음악에는 많은 장르가 있다. 그중 한국 사람에게 가장 대중적인 장르는 뭘까? 바로 트로트다. 트로트란 정형화된 리듬에 일본 엔카에서 들어온 음계를 사용하여 구성진 느낌을 주는 음악이다. 트로트를 대표하는 유명한 가수들은 많다. 하지만 우리 지역에도 그들 못지않은 실력과 끼로 무장한 가수들이 있다.이번에 만난 이병조(54) 씨도 그중 한 명이다. 이 씨는 지역 가수로서의 활동뿐만 아니라 예술봉사단 단장으로, 또 도매업체 사장님으로, 1인 3역의 몫을 '척척' 해내고 있다. 인터뷰를 위해 이 씨의 연습실에 도착하니 때마침 마이크를 굳게 쥐고 구성진 트로트 한가락을 뽑고 있었다.험난했던 과거, 그때 만난 트로트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성량은 연습실을 가득 메웠다. 노래를 마치고 내려온 이 씨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테이블에는 이 씨의 신곡 악보가 놓여있었다. 보통 악보 상단에는 작곡·작사가의 이름과 가수의 이름이 적혀있다. 가수 옆에는 '이병조'가 아닌 '이상용'이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이상용이라는 이름이 저를 널리 알릴 수 있는 예명이라고 하더라고요. 가수라는 직업 덕분에 이름이 두 개가 됐죠."대화를 나눠보니 말투와 억양이 경남 토박이는 아닌 듯했다."고향은 충북 옥천입니다.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17살이 됐을 때 갑자기 부모님께서 돌아가셨어요. 무작정 부산으로 건너가 건물이나 식당에 환기시설을 설치하는 기술을 배웠죠. 한때는 5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IMF가 찾아와 공사를 주는 건설업체가 도산해 일이 없어졌죠. 몇 달간 놀다가 우연히 지인의 소개로 마산에 오게 됐습니다. 살펴보니 마산에는 환기 관련 자재업체가 없는 겁니다. 기회다 싶어 바로 대리점을 열었죠."트로트가수 이병조 씨.이 씨는 가수 이전에 '대한환기'라는 업체를 운영하는 기업가였다. 작은 가게로 시작했지만 어느새 경남에서 총판을 할 만큼 성장했다. 이렇듯 음악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지만 우연한 기회로 가수가 됐다고 한다."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즐겨 불렀습니다. 힘겨울 때도 트로트 한 곡 부르면 피로가 사라지곤 했어요. 우연히 지역에서 하는 노래자랑 포스터를 보고 참가했는데 덜컥 수상했죠. 그렇게 가수가 됐고 지금까지 지역 가수로서 활동하고 있습니다."경남 곳곳의 축제와 무대를 누비면서 노래를 불렀다. 경남지역 가수 중에 이병조 씨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를 찾아와 트로트를 배우고 싶어 하는 제자도 생겼다."제일 기억에 남는 친구가 있습니다. 어느 날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고 내려왔는데 한 학생이 트로트를 배우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그 친구가 20대 초반이었으니까 벌써 7~8년이 흘렀네요. 무대도 세워주고 노래도 가르쳐주면서 몇 년을 같이 보냈습니다. 최근에는 데뷔했다고 연락이 왔어요. 정말 말도 못하게 기뻤죠. 저의 영향으로 트로트 가수가 됐다고 생각하니까 뿌듯하기도 하고.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녔습니다."지역 가수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서다대한민국에는 정말 많은 무대가 있다. 지역 곳곳마다 대표하는 축제·가요제가 하나씩은 있으니 그 수를 어림잡아도 몇백 개는 될 듯하다. 문제는 지역 가수들이 노래할 수 있는 무대가 없다. 유명한 가수들만 선호하다 보니 지역에서 활동하는 가수들은 어쩌다 한 번, 그것도 정말 작은 보수로 불려 다니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관객들은 유명 가수들을 선호하죠. 하지만 지역에도 실력 있는 가수들이 많습니다. 정말 피나는 노력을 하지만 유명 가수들과 견주기에는 인지도 면에서 많이 부족하죠. 출연료는 비교조차도 할 수 없습니다."트로트가수 이병조 씨.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가수가 많아지다 보니 가수협회도 우후죽순 생겨났습니다. 가장 많은 가수들이 소속되어있는 협회가 2개 있는데요. 이 협회들이 주최하는 행사도 본인들만의 잔치가 되기 십상입니다. 자기 식구 챙기기에 급급한 거죠."이에 회의를 느낀 이병조 씨는 '다솜문화봉사예술단'이라는 단체를 창단했다. 경남지역의 고아원, 양로원, 병원 등을 다니며 지역 가수들과 무료 노래공연을 하고 봉사활동도 하는 단체라고 한다."제가 노래 말고 봉사활동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어렸을 때도 틈틈이 봉사활동을 했어요. 마산에서 자리를 잡고 난 후 봉사활동을 하러 여기저기 다녔죠. 그러다 보니 뜻이 맞는 사람들이 생겼고 2006년에 단체를 만들게 됐습니다. '다솜'은 순수 우리말로 사랑이라는 뜻이에요. '순수한 사랑을 실천하는 봉사단체가 되자'는 의미죠."단순히 봉사만 하는 단체가 아니다. 창단을 마음먹을 때부터 노래공연과 봉사활동을 접목시키고자 했다. 지역 가수들에게 무대도 제공하고 봉사도 하고자 했지만 '음향기기'라는 가장 큰 벽에 부딪혔다."음향 회사를 한번 부르면 40~50만 원이 듭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노래공연을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죠. 당장은 부담이 되더라도 미래를 보고 자비를 털어 음향기기를 구입했어요. 복잡한 구조와 전선으로 돼 있어 다루기가 까다롭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마스터했죠. 음향기기가 해결되자 일은 탄탄대로였습니다."이내 지역 가수들에게 손을 뻗었다. 이 씨의 계획은 말 그대로 '예상 적중'이었다."가수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섭외하니 너 나 할 거 없이 참여 의지를 밝혔습니다. 회원들끼리 회비를 거둬서 봉사하는 거라 출연금도 주지 못했지만, 다들 개의치 않아 했습니다. 무대에 대한 갈증이 그만큼 간절했던 거죠. 시너지 효과도 대단했습니다. 저희 활동을 보고 함께하고자 하는 가수나 봉사자들도 많이 있었어요. 지금은 26명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트로트가수 이병조 씨.어른들의 몫이 씨는 음악을 하고 싶거나 피치 못한 사정으로 방황하고 있는 지역 청소년들을 선도하기 위한 사업도 준비 중이다."막무가내로 다그쳐서는 안 돼요. 그런 아이들을 보듬어서 꿈을 키우게 해줘야죠. 저에게 개인 연습실이 있습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청소년들은 여기서 노래를 가르치거나 춤을 연습하도록 할 생각입니다. 실력이 쌓이면 같이 공연도 하는 거죠. 또 방황하는 친구들은 같이 봉사활동을 나가서 더불어 산다는 게 무엇인가를 가르칠 겁니다. 그게 우리 어른들의 몫이 아닐까요?"트로트 가수, 예술봉사단 단장, 업체 사장님까지. 정말 24시간이 부족한 하루를 살고 있는 이병조 씨. 조금은 벅차거나 힘들지 않을까. 기자의 질문이 불필요했음을 깨닫기까지 채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전혀요. 전부 제가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오히려 더 하기 위해 노력하죠. 노래 실력을 키우기 위해 매일 연습하고, 더 많은 봉사를 위해 시간을 쪼개서 쓰고 있습니다."부부는 닮는다고 했던가. 아내도 이런 이 씨를 자랑스러워한다고 했다."사실 수입의 2% 정도를 매달 단체 활동에 바칩니다. 그래도 아내는 괜찮다고 해요. 우리 집사람도 남 돕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저에게 '우리 남에게 베풀고 살자'고 항상 말해요. 내조를 잘해줘서 고맙게 생각합니다."트로트가수 이병조 씨의 무대.노래는 삶의 활력소그가 노래와 봉사를 통해 찾고자 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 물음에 한참을 고민 후 입을 열었다."막상 정의하자니 어렵네요. 더불어 사는 세상이잖아요. 똑같은 인간인데 가진 자는 행복하고 못 가진 자는 불행한 삶을 사는 건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기회를 제공하고,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는 거죠. 제가 고아원에서 만났던 아이들이 벌써 20대 중반이 됐습니다. 제가 하는 일에 관심이 있는 아이들은 직원으로 취직시켰고 다른 기술을 배우고 싶어 하면 회사나 공장으로 연계해줬어요. 그런 의미에서 봉사는 한 번 인연을 맺었으면 끝까지 책임지는 거라고 정의할 수 있겠네요."이내 말을 이어갔다."노래는 한마디로 삶의 활력소입니다. 누구나가 그렇듯 저에게도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고비가 찾아왔겠습니까. 그때마다 노래를 부르면서 다시 일어날 힘을 얻었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또 무대에 오르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짜릿한 무언가가 전해져 와요. 아마 목소리가 나올 때까지는 계속 부르지 않을까요?" 트로트가수 이병조 씨.인터뷰를 끝낸 늦은 시간에도 이 씨는 노래연습을 준비했다. 그 열정에 감탄하며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저희 봉사단에 더 많은 사람들이 동참해서 저희 손길이 좀 더 구석구석 뻗어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공연도 많이 해서 가수 이상용 석 자를 알리는 것도 올해 목표입니다. 그래서 매일 맹연습을 하고 있는데 노래는 정말 아무리 불러도 끝이 없네요. 마지막으로 우리 지역 가수들의 끼와 실력을 마음껏 분출할 수 있는 기회도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트로트가수 이병조 씨.
16.09.26.경남, 나아가 전국에서 연극을 하는 이들에게 "당신이 가장 존경하는 연극인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가장 많은 답변으로 돌아오는 이가 있다. 바로 밀양연극촌 이사장이자 지금도 연극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윤택 선생이다. 1952년 부산에서 태어난 이윤택 선생을 비유하는 단어는 무수히 많고, 연출가 이전에 전직 기자 출신이자 문화평론가, 시인, 극작가, 연출가, 예술감독, 무대감독까지 그를 설명하는 직함도 다양하다.1억 배우 오달수, 악역으로 얼굴을 알리기 시작해 최근 영화 <곡성> 주연까지 맡으며 연기스펙트럼을 넓힌 영화배우 곽도원, 여배우 이민정 등이 가장 무서워하면서도 존경하는 연출가 이윤택. 그를 지난달 3일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 기간 밀양연극촌에서 만나봤다.연극이 너무 하고 싶었어이윤택 선생이 연극과 첫 인연을 맺은 지 4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지금까지 그의 손을 거쳐 연출된 창작연극만 100편이 넘는다. 작가로서 글을 쓰고 연극과 관련된 일을 해 만들어진 연극은 약 300편에 이른다.이윤택 선생은 "연극이라는 것에 매료돼 살아왔다. 그동안 가족들이 많이 힘들었지만 내 인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이윤택 감독.그에게 가장 큰 시련을 안긴 것은 1972년이다. 당시 반년 이상 준비했던 연극이 폭삭 망했다.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돈을 모아 새로운 작품을 만들었는데 당시 시대가 뒤숭숭한 상황에서 표 값은커녕 대관료까지 낼 돈이 없어 도망치다시피 하며 극장을 나왔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어머니는 극장 직원들이 돈을 다 받아갔다며 이야기를 꺼냈다. 현실이라는 벽에 처음으로 부딪혔다. 이후 연극계에서 몇 차례 연극에 더 참가했지만 현실에 타협하면서 '잠시만 안녕'을 외쳤다.군에 갔다가 가정형편 때문에 일찍 제대한 청년 이윤택은 집이 어려워진 뒤 연극은 못하고 경상권을 돌아다니며 일을 했다. 보름을 공부해 공무원이 되서는 부산우체국에서 일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직장을 관뒀고 마산 양덕동에 있던 한일합섬 염색공장, 밀양에서 한국전력 주임, 부산 화력발전소에 이어 부산일보 기자로 살아갔다.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이윤택 선생은 책과 음악을 즐겼다. 음악다방에 가서 클래식 음악을 들었고, 서점에서 시집을 보거나 책을 사 보았다. 기자가 된 뒤에는 살림살이도 나아졌다."당시 기자는 지금이랑은 달리 대우가 좋았어요. 월급도 많았고 연극쟁이로 살 때보다 훨씬 풍족했습니다. 세상에 순응하는 내 모습이 익숙해졌었고. 물론 그러면서도 1979년에 희곡작가로 데뷔하기도 했어요. 그래도 연극을 떼 놓고 살기는 어렵더라고요."그러던 어느 날, 유명해진 옛 학교 친구 영화배우 하재영을 만났다. 친구를 보고 반가워야만 했는데 반가운 마음 한쪽에는 부러운 마음이 공존했다. 그러다 친구의 말 한마디가 그를 깨웠다. "연극, 계속하지?"친구의 질문 한 마디에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다짐했다. "내가 꼭, 반드시, 돌아가겠다"고.그리고 시간이 지나 1986년 1월, 사직서를 제출했다. 물론 사직서가 수리되기까지는 쉽지 않았다."신문사가 그래도 의리가 있었어요. 그만둔다니까 부장부터 국장, 이사, 대표까지 말리더라고요. 신문기자 그만두고 연극을 다시 하겠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사직서를 냈고, 설득했습니다. 아내에겐 연극이 아니라 글을 쓰겠다고 설득을 했어요. 뭐 다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벌었던 돈은 든든한 자금이 됐고, 그간 다양한 직업을 거치면서 쌓은 경험은 연극을 위한 아이디어가 됐다. 회사를 박차고 나온 뒤 소극장에서 공연을 시작했다. 그 시작이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극단이자 믿고 보는 이윤택의 연희단거리패의 출발이었다. 이윤택 감독.연희단거리패 서울, 부산 아닌 밀양으로"연출가 이윤택은 운이 좋은 사람이다."연희단거리패는 부산일보 기자를 그만둔 뒤 이윤택 선생이 1986년 창단했다. 자체 가마골 소극장을 중심으로 <죽음의 푸가>, <히바쿠샤>, <산씻김>, <시민K> 등 일련의 상황극을 올리면서 연극 양식을 갖춘 실험극단으로 성장했다.연희단거리패를 만들고 지금껏 많은 배우, 스텝이 그의 밑에 있었고 독립했다.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배우 유인촌, 전 환경부 장관 손숙이 그와 함께 일을 했고, 영화계 1억 배우 오달수, 곽도원, 이민정도 연희단거리패에서 이윤택 선생과 함께했다.1988년부터 서울 공연을 시작한 연희단거리패는 승승장구했다. 그러던 1999년 정동극장에서 내놓은 연극 손숙 주연의 <어머니> 공연에 전 이상조 밀양시장을 비롯한 밀양시 교육장과 밀양시의원들이 공연을 관람하러 왔다. 그 자리에서 이윤택 선생은 "밀양으로 갈 테니 폐교 하나만 주십시오"하고 요청했고 연희단거리패는 밀양연극촌으로 향하게 된다.구 월산초등학교는 우리극연구소 밀양연극촌으로 재탄생했다.연고도 없는 밀양이었다. 다만 연출가가 아닌 다양한 직업을 전전할 때 있었던 곳이 밀양이었지만.이윤택 감독.이윤택 선생은 밀양으로 온 이유를 총 4자리로 들었다."우선, 문화가 꽃피려면 인구가 10만 명 이상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프랑스 아비뇽 연극축제나 에던버러 페스티벌이 성공한 이유 중 하나는 인구가 적지만 알찼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다음 문화적 자긍심이 지역에 필요합니다. 밀양은 스스로 양반을 자처하는가 하면 유학과 불교가 함께 공존하는 문화가 꽃핀 곳이거든요."그 밖에 밀양이 자연풍광도 뛰어난 점과 마지막으로 교통 편의를 생각했다."문화예술이 성공하려면 결국 교통이 좋아야 해요. 그래서 서울 위성도시는 안된다는 게 제1원칙이었어요. 그렇다고 서울과 너무 멀면 그것도 쉽지 않은 선택지고. 밀양은 거리가 멀긴 하지만 울산, 부산, 경남이 가깝고 서울에서 내려오는 길도 오래 걸리지 않아서 선택하게 된 이유입니다."밀양에 도착한 뒤 올해로 17회를 맞은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를 기획했다.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 첫해 밀양시에도 알리지 않았다. 당연히, 경남도, 정부에도 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입소문을 통해 흥행에 성공했다. 첫해 당시 예산이 부족해 후배들에게 100만 원씩 쥐여주며 도움을 청했고 후배들은 흔쾌히 도움을 줬다.이윤택 감독.첫해 축제가 성공리에 마친 뒤 이듬해부터 관의 지원을 받기 시작했고,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가 지금의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됐다.이윤택 선생은 축제를 기획하고 운영하면서 한 가지 철칙을 지키고 있다. 바로 축제예산은 축제예산으로만 활용한다는 것."관에서 돈을 받는 건 세금을 받아쓰는 것이지 않나요. 축제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라고 준 세금인 만큼 허투루 쓸 수는 없지 않습니까."이윤택 감독.나는 이상주의자다. 그래서 연극을 한다연희단거리패의 가장 큰 특징은 단원 모두가 함께 합숙을 한다는 것이다. 단원 모두가 함께 웃고 울며 연극에 대한 열정을 키우고,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이윤택 선생은 연희단거리패 단원 80여 명이 왜 합숙을 하는지 설명하며 웃는다."제가 혼자 사는 걸 싫어합니다. 외롭고 심심해요. 그래서 합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그러면서 그는 연극에 빠져든 이유를 전했다."삼대독자입니다. 어릴 때부터 노는 걸 좋아했지만 또래 형제가 없어 외로움을 많이 탔습니다. 사랑도 우정도 모두 깨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연극은 서로 합의를 봐야 하니 하는 만큼 당시에는 그 어떤 이보다 애틋하게 만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연극이 아주 좋아요. 그때만큼은 행복하니까요."행복하고자 연극의 끈을 놓지 않는 이윤택이다. 그는 신문기자를 하면서도 암울했던 사회상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한다.이윤택 감독.당시는 광주·부마사태 등 격동기였다. 신문기자로서 온 힘을 기울여 기사를 썼다. 그러다 군사독재와 뜻을 같이하는 3당 통합과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지켜보며 지식인들의 변화를 보고 괴리를 느꼈다. 그래서 더 연극에 몰두했다."연희단거리패를 만들 때 했던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현대판 남사랑패가 되자. 유랑극단이 되자고. 신나고 행복하기 위해 연극을 하자고."이윤택 선생은 시인, 평론가, 연출가, 극작가, 전직 교수, 예술감독 등 다양한 명함을 지니고 있다. 그중 가장 원하는 직업은 역시 연출가였다."비평가, 평론가들은 사실 자기방어적 입장에서 글을 많이 쓰고, 교수는 한 번 사람들을 가르쳐보고자 해본 거예요. 예술감독 역시 세상이든 뭐든 개혁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라 생각하고 했습니다. 근데 해보니 바뀌지가 않더라고요."현실의 부조리함을 느끼고 회의적인 사고가 자리를 잡아갔다. 그래서 연극이 더 매력적이었다."예술의 기능에 대해 거창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는 예술이란 부조리함 속에서도 삶의 이유를 찾는 거라 봅니다. 정당성을 제시하는 것이 예술의 기능이에요. 전 이상주의자로서 앞으로도 계속 정당성을 제시하고 싶습니다."이다. 난 이상주의자로서 앞으로도 계속 정당성을 제시하고 싶다."
16.09.09.이임춘(52·경위) 거제경찰서 남부치안센터장은 경찰관이자 미술작가다. 일상에서는 거제 어촌마을 치안을 책임진다. 그러다 경찰 제복을 벗는 순간 미술작가로 변신한다. 그의 수상한 이중생활(?)을 들여다봤다.거제경찰서 남부치안센터는 남부면 다대리 어촌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 근무자는 이 센터장 혼자다. 차로 10~15분 거리에 있는 '바람의 언덕', '해금강', 명사해수욕장 같은 유명 관광지가 그의 관할 구역이다. 피서지가 많다 보니 여름철 가장 바쁠 수밖에 없다. 오전 9시 출근해 이곳저곳 순찰하고, 신고 현장에 나가면 '나 홀로 근무' 외로움을 느낄 새 없이 하루가 지난다.그는 고성에서 태어나 어린시절 줄곧 고향에서 지냈다. 할아버지·아버지는 전통 대바구니를 만드는 장인이었다. 그는 대나무를 놀이기구 삼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7살 때 아버지와 함께 대나무밭에 갔습니다. 맑은 하늘에 비가 떨어지고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 속에서 대나무 잎이 휘날리는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웠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그 느낌을 그림으로 옮겨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더랬죠."이임춘 거제경찰서 남부치안센터장이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이렇듯 예술에 대한 꿈틀거림은 온몸으로 터져나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에 대한 인식도 무감각해졌다. 토목 쪽으로 공부하면 돈벌이가 수월하다는 형들 말에 경상대 토목학과에 들어갔다. 물론 얼마 가지 않아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대신 중국어를 부전공으로 신청했다. 대만으로 유학을 떠나 2년 정도 동양사상을 공부했다.이때 중국어 관광통역원·관광종사원 자격증을 땄다. 대학 졸업 후 관련 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평생직장을 찾다 눈에 들어온 경찰 순경 공채에 응시, 30살 나이에 합격했다.이 치안센터장은 경찰 생활을 하던 30대 중반에 끓어오르는 예술 DNA를 다시 확인하게 된다. 당시 이런저런 이유로 삶이 좀 지쳐가는 느낌이었다. 오히려 그것이 삶의 전환점으로 작용했다."어릴 때 앉았다 하면 그림을 그리며 즐거워했던 기억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다시 해보자는 생각에 무턱대고 물감을 사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 그랬더니 어릴 때 그 시골길을 걷는 듯한 편안함이 온몸에 밀려들었습니다. '이게 정말 내 길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이임춘(52·경위) 거제경찰서 남부치안센터장은 경찰관이자 미술작가다. 거제 개인 작업실 외벽에 새겨놓은 자신의 사진과 프로필.한동안 취미로 계속 그림을 이어갔다. 주변으로부터 좋은 평을 듣다 보니 욕심이 났다. 거제 집에 아예 작업실을 마련하고 전문 작가로 나섰다. 특히 대나무공예를 현대미술로 승화한 '테어링 아트(tearing art)'라는 새 장르를 개척해나갔다. 그리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활용해 대중들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국외에서 오히려 더 큰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2011년 터키 이스탄불, 2012년 미국에서 초대전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이다. 현재 페이스북 친구 5000명 가운데 4000명이 외국인이다. 최근에는 세계적인 배우 제라르 드파르디외(프랑스)로부터 연락이 왔다."이 사람은 세계적인 미술 수집가이기도 해요. 우연히 아트 딜러를 통해 제 작품 도록을 본 거죠.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는데 경찰관이라고 하니까 더더욱 놀랐나 봐요. 그물망처럼 복잡한 삶의 고뇌를 표현한 작품 '인생'을 매입하겠다는 뜻을 전해왔죠. 지난 7월 고가의 대금을 부쳐왔더군요. 제가 알고 보면 숨은 애국자입니다. 하하하."경찰관과 미술작가, 두 가지 모습으로 살아온 지도 벌써 15년이다. 경찰 경험이 작품 활동에서 큰 자양분이 되기도 한다."오래전 거제 장승포에 순찰 나갔을 때입니다. 봄날이었는데 저쪽에서 망아지 같은 물체가 웅크려 꽃을 먹고 있는 겁니다. 자세히 보니 옷을 모두 벗고 있는 여자였습니다. 왜 그러고 있냐고 물으니 '바람난 남편한테 쫓겨났는데 배가 너무 고파 꽃을 먹었다'는 겁니다. 이 기억이 저에게는 너무 충격적으로 남아 '꽃을 먹는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작품에 담았습니다. 경찰 생활하면서 접한 여러 인간 군상을 작품에 많이 녹이게 됩니다."
16.08.31.